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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렇게 첨예하게 투표 결과가 붙는 선거는 처음이었습니다. 출구 조사에서조차 어긋납니다. 한쪽에서는 2번 후보가 0.6%가 앞선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1번 후보가 0.7% 우세하다 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차 범위 내 초경합이라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심장 쫄깃하고 손에 식은땀을 흘리며 결과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던가요. 결국 자정을 넘어서까지 투표 결과를 틀어넣고 보다가 그대로 깜빡 잠이 들고 말았지요. 정신이 들어 눈을 뜨려는데 귓가에 틀어놓은 유튜브에서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당선 확실, 2번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당선이 유력합니다.”
혹 잘못 들은 걸까, 아직 꿈을 꾸나 혼란스러운 제게 명쾌한 목소리로 아나운서는 말합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윤석열 후보 당선이 확실합니다.”
무심코 본 시계는 세시 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확인하니 겨우 0.7% 차이가 당선과 낙선을 결정지었습니다. 득표 차는 24만 7077표, 역대 대선 중 최소 표차입니다. 이번 대선 무효 표가 30만여 표라니, 무효 표보다도 적은 표차입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해 마음 쓰린 1,736만 명의 사람들, 이들의 씁쓸한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까요? 초접전으로 맞붙은 다른 생각과 마음이 과연 하나로 뭉쳐질 수 있을까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결과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답답하고 힘들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주위에 의외로 많습니다. 대선 결과 기사마다 달리는 슬픔 어린 댓글들.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과 신념, 지지가 한순간 불꽃처럼 산화된 것 같다고 합니다. 앞날이 암울하게 느껴지고 의기소침,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고 합니다. 심리치료라도 받아야겠다는 게시글도 올라옵니다. 선거 결과 발표 이후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저와 당신, 우리의 어둡고 텅 빈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요?
헛헛한 이 마음을 안고 고민하다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겐 선례가 있다는 사실을요. 2016년 중반 국민투표를 통해 난데없이 결정되었던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브렉시트를 기억하시나요? 그 결정 이후 세계 4대 기축통화 중 하나인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3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정도로 전 세계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2016년 말의 미국 대선은 또 어떻습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그날 구글의 가장 많이 검색된 키워드 중 하나가 ‘캐나다 이민’ 일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당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을 위해 다수의 언론들이 이렇게 극복하라는 조언을 싣는 게 한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습니다. 일명, ‘How to survive Trump/Brexit’ 기사입니다. 그 내용을 기반으로 6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의 당황스러운 대선 결과에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당신께 전수합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선 결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일명 20대 대선 '선거 결과 생존법!’

여러 글과 조언 중 가장 제게 도움이 되었던 기사는 정치 분석 및 평론으로 유명한 잡지, 폴리티코(Politico Magazine의) 기사,‘트럼프 생존법 (How to Survive Trump: A handy guide for liberals!)’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사, 전 공화당 출신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일하던 Matt Latimer가 쓴 글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공화당원인 나도 8년이나 민주당의 오바마 정부 시대를 겪었어. 그러니 너도 할 수 있어’라는, 약간은 얄미운 글. 그래도 솔직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5 가지의 조언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유래 없이 치열했던 선거 과정에 너무나 근소한 표 차이를 생각하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믿을 수 없어, 뭔가 잘못되었어, 어딘가 문제가 있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오바마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도 그럴 거야?라고 말이지요.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촛불 탄핵을 거쳐 19대 대통령 임기 기간 중, 박근혜 대통령의 열렬 지지자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을 수 없다고, 정권 탈취 수작이라고, 다 누군가의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명 태극기 집회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을 겪을수록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는 조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맞는 말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았던 후보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 첫 백일이 특히 어려울 거라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그 말에 문득 상상해 보았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갖은 행사에 참석하는 걸 볼 때마다 속이 아려올 거예요. 바라지 않는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는 것도 보게 되겠지요. 동의하지 못하는, 혹은 굳이 저걸 왜? 싶은 정책이 결정되어 수행되는 것도 경험할 겁니다. 지지하던 정책이나 없어지고 조직과 기관이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걸 볼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했는데 벌써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게 저자의 조언은 단 한 마디, 긴장을 풀라는 겁니다. 새로운 대통령의 결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대하기 시작하면 정작 중요한 일은 놓치기 십상이랍니다. 그러니 지지하던 후보가 아니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과 방향이 맞지 않다 해도 인사 결정이나 집행되는 정책이 다 나쁘거나 잘못될 수는 없으니까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꼭 반대해야 할 일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게 보다 효과적입니다.
선거 유세하면서 결이 맞지 않는 불편한 말과 행동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권력을 과용하진 않을까,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까, 정치적 보복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믿으라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고,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걱정이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을 믿으라고 바꿔 말하겠습니다. 길지 않은 민주주의 역사, 국민의 손으로 갈고닦아 여기까지 온 우리의 저력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역사상 최소의 표 차이를 고려해서라도 더 조심스레, 신중하게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겁니다. 어차피 집행된 결정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공무원들이 수행하는 일입니다. 대통령 한 명 바뀌어도 나라 전체가 바뀌지 않더라는 거,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굳건한 시스템과 든든한 국민이 있으니 뒤로 가지 않습니다.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을 뿐 우리나라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계속 나아갈 겁니다.
선거에서 져서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지금, 정치 소식도 뉴스도 보고 싶지 않은 그 마음 이해합니다. 다시는 투표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지난 선거에서 1,907만 명의 유권자가 지금 대통령이 아닌 다른 분을 지지했다는 거 말입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걱정했던 그 1,907만 명의 당시 유권자들, 지난 5년 동안 잠자코 있지 않았습니다. 광화문에서 '태극기 시위'를 하고 유튜브에서 엄청난 금액의 슈퍼 챗과 구독자 수로 입증되는 인기 채널과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매일같이 '카톡'하며 울리는 엄청난 숫자의 SNS 참여가 있었습니다. 설령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길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여소 야대의 정치 현황을 고려하면 우리는 그나마 더 나은 상황입니다. 얼마든지 많은 의견, 다양한 생각을 외치고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친구와 가족, 혹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서로 의지하세요. 그리고 지금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곧 지방 및 국회의원 선거도 있지만 5년만 기다리면 대통령 선거가 다시 짜잔, 나타납니다. 그때 또 뽑으면 됩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최고 혜택, 그러니 마음껏 누려야죠. 그러니 좌절하지 마세요. 5년 뒤 또 다른 기회가 있습니다. 😄
How to Survive Trump
A handy guide for liberals!
www.politico.com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만족스럽지 않은 선거 결과 때문에 우울하고 속상한 당신, 비슷한 마음으로 지난 5년을 살아온 1,900여만 명의 유권자를 기억하자, 이게 저자의 조언입니다. 지지하지 않지만 다수결로 결정된 대통령 당선자, 앞으로 우리나라를 5년 동안 책임지는 엄중한 책무를 짊어졌습니다. 속 쓰리지만 어쩌겠어요? 이를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느긋하게 지켜보며 곧 있을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5년 후의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기다릴 뿐입니다.
Every tried. Every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선거 결과로 시작한 오늘, 이 글귀를 책에서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정치도, 심지어 변화를 만드는 것조차 장기전이구나 라구요. 민주주의 체제도 딱 그렇습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독재정치를 막기 위한 최선의 사회 시스템인 민주주의. 민주주의야말로 끝없이 시도하고 수없이 실패하지만 그에 기죽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하는 우리들. 실패할 때 좀 더 낫게, 똑똑하게 실패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지도자 한 명이, 정당 하나가 몇십 년이고 영원히 집권하지 못합니다. 행정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가 서로를 견제하고 미묘하게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시스템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장기전, 그러니 지금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옆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를 위로하는 시간입니다. 애썼다, 수고했다 어루만지고 마음을 달래기로 해요. 애써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 대다수의 뜻과 바람을 기세 좋게 약속했던 것처럼 잘 투영하는지 바라봐 주기로 해요.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겹쳐지고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고 주기적으로 다시 선택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들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우리의 삶은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과 나의 영향력으로 바꿔지지 않는 결정이 이어집니다. 이번 주 대통령 선거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 과정은 보다 성숙하고 현명한 인격체로, 시민으로 나아가는 마중물 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서글펐던 마음이 찬찬히 가라앉습니다. 어때요, 이 글을 읽은 당신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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