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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고파 읽다가 역사 공부로 막을 내린 그랜드 투어 -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 (ft. 관광과 여행, 그랜드 투어 차이점?)

매일같이

by 어쩌다쨈 2022. 3. 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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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를 3 문장으로 요약하면

1. 18세기 서구권에서 여행은 교육의 일부로 간주되고 젊은 남자 귀족과 젠트리에게 허락되었다

2.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기록하고 사람을 만나는 게 엘리트 교육의 정수, 그랜드 투어다

3.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주는 것

이런 분께 권합니다

코로나 이후 여행을 가지 못해 안달이 난 당신, 매일같이 여행 유튜브 보면서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당신, 관광이 아닌 여행을 다니고 싶은 당신, 보이는 것 그 뒷면을 경험하고 싶은 당신, 여행으로 삶과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픈 당신, 여행의 역사가 궁금한 당신, 여행과 역사와 책을 사랑하는 당신, 당신만 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는 당신께 권합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심 없는 당신, 역사는 더 지겨운 당신, 혹은 오늘을 살기 바빠 당장 관계없는 공부는 할 여유는 없는 당신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단지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코로나 이후로 전 세계가 빗장을 잠그기 시작한 지 벌써 3년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보급되고 그리고 위험도가 비교적 낮은 오미크론이 주력 변이체가 되면서 조금씩 방역체계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올해 중반이 지나면 이전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코로나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전 세계가 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 밖 여행이 다시 멀어지려나, 아쉬운 마음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여행에 대한 책이지만 역사 책에 가까운, 그렇지만 읽다 보면 여행에 대한 욕구가 뿜뿜 솟아나는 책, 바로 ‘그랜드 투어'입니다.

그랜드 투어는 귀족층 자제들이 자신의 교육을 이끌어 줄 가정교사와 함께 2~3년 정도 당시 문화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프랑스를 거쳐 고전 문화의 정수, 이탈리아와 그 외 다수의 유럽 국가들을 다니면서 각 나라의 문명을 배우고 유명 지식인과 사상가,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는 여행을 말합니다. 18세기경 영국 왕실과 상류 귀족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그야말로 엘리트 교육의 정수입니다. 이런 트렌드는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지요. 책을 읽으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 1.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의 의미 - 자유인

혈통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계급사회의 18세기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어찌나 감사한지요. 신분과 노동에 묶여 살던 당시, 자신의 몸을 지킬 무기를 소유할 수 있고 원하는 곳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는 게 바로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1983년 1월 1일 처음으로 국민의 관광 목적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지요. 그조차도 50세 이상 국민에 한하여 당시 현찰 200만 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에 유효한 관광 여권이 발급되었다고 합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1989년 1월 1일부터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지만 소양교육이라는 이름의 반공교육을 받아야만 여행을 나갈 수 있었답니다. 그 교육은 1992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지요.

나이와 성별, 직업과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고 해당 지역에서 허가하는 만큼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태어난 국적에 관계없이 원하는 곳으로 옮겨가 공부하고 삶을 영위하고 해당 국가의 거주민 자격이나 국적을 취득하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서로의 삶과 문화를 나누고 비행기로 짧으면 몇 시간, 길면 하루나 이틀이면 전 세계 어디든지 방문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무비자로 190개국을 방문할 수 있는, 세계 ‘여권 파워’ 3위에 빛나는 대한민국 국민인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생각 2. 관광과 여행, 그리고 그랜드 투어의 차이

우리는 흔히 관광과 여행을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책에서는 여행은 ‘다양한 목적을 지니고 길을 떠나는 행위'를 말하고 관광은 ‘일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즐거움을 위한 여행의 한 형태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랜드 투어는 ‘최소한 몇 개월 이상 로마나 파리 같은 주요 도시를 여행하면서 문화를 체험하고 고대 유적을 답사하는' 것으로 범위를 규정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즘 우리들이 흔히 떠나는 배낭여행이 바로 딱 그랜드 투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 18세기-19세기 당시의 그랜드 투어라면 평균 2-3년 걸리고 전체 여행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동행 교사가 있으며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해당 지역의 유력인사 및 지식인과 예술가를 만나는 게 기본이지만 말입니다.

여행은 크게는 ‘회귀를 전제로 한 인간의 공간적 이동’으로, 다양한 목적을 지니고 길을 떠나는 행위를 광범하게 지칭한다면, 관광은 ‘일상권을 떠나 다시 돌아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즐거움을 위한 여행’으로 정의된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이용해 다양한 자료와 살아 숨 쉬는 문화와 사회 정보를 찾아볼 수 있으니 더 이상 개인 동행 교사가 없이도 혼자서 여행하며 배울 수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유력인사와 지식인과 예술가, 만나면 좋겠지만 솔직히 지금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나지 못하는걸요. 그다지 욕심은 없습니다. 제가 욕심나는 건 바로 여행 기간입니다. 공부하고 일했던 미국을 제외하고 제가 다녀온 여행은 3주가 최대입니다. 기간이 짧으니 들러야 할 박물관과 미술관, 문화 유적지를 다녀오는 것만으로 빠듯했습니다. 게다가 일에 쫓겨 도망가듯 여행 왔다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던 저, 먹고 자고 방문할 곳을 예약하는 데 급급해 제대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기록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사진조차 많이 찍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쉬고 쇼핑하는 기회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최상급 엘리트들만 누릴 수 있었던 교육의 정수 그랜드 투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저도 그 멋진 기회를 누릴 수 있는데 이제껏 별생각 없이 여행했구나 싶어 아쉬웠습니다. 그렇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때라고 하지요. 지금이라도 저만의 그랜드 투어를 준비하고 계획해서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생각 3. 나를 위해 내가 만드는 나의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리서치하고 연구한 내용으로 저술한 책이다 보니 당대 작가들이 출판한 그랜드 투어를 위한 여행 방법에 관한 내용이 꽤 나옵니다. 교육을 위한 그랜드 투어이니 특정 카테고리를 정해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감상을 적으라고 요구합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여행안내서와 학습지를 합한 책이라고 할까요? 생각보다 깊고 다양한 분야를 다루어서 놀랐습니다. 책에 나온 예시들을 잠깐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시에 들어가면 ‘성문, 교구 교회, 거리, 수도원, 다리, 성당, 거주민' 등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에 대해 본 것을 기록하고 자신의 감상을 옆에 쓰고 다음 질문에 대해 답을 적어라.

- 성직자의 급료는 얼마이며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 어떤 군사 훈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 장례 절차는 어떠한가?

- 이혼 성립에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인가? 상하수도 설비는 어떠한가?

- 대학서 체벌은 어디까지 이루어지는가?

- 빈민을 교화하기 위한 강제 노역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경제와 군사, 사회, 교육 전반에 걸친 깊이 있는 질문, 이런 내용은 지금도 리스트로 만들어 찾아보고 생각해 볼 만하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관심사에 맞는 저만의 질문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불끈 솟습니다. 책과 공원과 예술과 시장을 좋아하는 저라면 이런 내용을 질문지로 만들어 방문하는 도시마다 찾아보고 기록하고 생각을 정리하면 재미있겠다 싶습니다. 가령 이런 질문들 말입니다.

  • 서점은 몇 개나 있나? 주요 이용 고객들은 누구인가 (성별, 나이 분포)? 어떤 책이 많이 보이나?
  • 도서관은 어떻게 운영되나 (자원봉사자, 공립, 사립)?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 공원과 광장은 몇 개나 되나?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나? 어떻게 운영되고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 -술관과 박물관은 몇 개나 있나? 어떤 주제와 시기 작품에 집중하는가?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나?
  • - 어떤 시장이 존재하나 (재래시장, 마트 종류, 특설 시장 등)? 어떤 사람이 이용하나? 어떤 물건이 있나? 해당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주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코로나만 끝나 봐라, 바로 여행을 가겠다며 벼르고 있는 저, 여행을 가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접한 건 행운입니다. 실수 없고 효율 만점인 여행을 위해서는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여행 경로를 따르는 게 정답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들 다 가는 명소에 들려 사진을 찍고 남들 다 가는 맛집에서 음식을 먹고 벼르던 명품을 사들고 들어오는 여행, 어차피 저와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안면을 익히고 마음을 맞춰가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가는 여행, 배우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하는 여행이 하고 싶습니다. 돌아가고 시간과 에너지가 배도 더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여행,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작은 럭셔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만의 ‘그랜드 투어'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오늘 시작합니다.

참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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